스테이블코인 컨트롤타워의 부재
전 세계 스테이블코인(stablecoin) 시장은 이미 하나의 통화 인프라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2025년 한 해 동안 온체인에서 오간 스테이블코인 결제·송금 규모는 약 33조 달러, 전년 대비 72% 성장했습니다. 이 중 대부분은 달러에 연동된 스테이블코인 입니다.
같은 시점 전체 스테이블코인 시가총액은 2,000억 달러를 훌쩍 넘겼고, 테더(USDT)와 USDC 두 종목이 이 시장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숫자만 보면, 이미 “달러 기반 디지털 현금”이 글로벌 결제와 유동성의 기본 레이어가 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제 “스테이블코인이 필요하냐, 마냐”가 아니라, “이 상황에서 원화(KRW)는 어디에 서 있을 것인가” 로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1. 미국: 민간 달러 스테이블코인, 소매 CBDC는 금지
미국의 전략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핵심은 두 줄로 요약됩니다.
- 민간 업체 중심으로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USDT, USDC 등)은 육성한다.
-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 central bank digital currency)의 소매형(retail CBDC)은 금지한다.
2025년 기준으로 USDT 시가총액은 약 1,700억 달러, USDC는 700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됩니다. 이 둘이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0%를 넘습니다. 거래 측면에서도, 2025년 한 해 동안 USDC는 약 18.3조 달러, USDT는 약 13.3조 달러 규모의 온체인 결제에 사용되었습니다.
이 와중에 미국 의회와 행정부는 연준이 개인에게 직접 소매용 CBDC를 발행하는 모델을 금지하거나 강하게 제약하는 법안·행정명령을 잇달아 논의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민간 중심의 스테이블코인 산업 육성과 더불어 CBDC의 경우 정치·프라이버시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결국 미국이 선택한 조합은 다음과 같습니다.
“소매 CBDC는 하지 않는다. 대신 민간이 발행하는 USD 패깅된 스테이블코인으로 글로벌 디지털 달러라이제이션(digital dollarization)을 밀어붙인다.”
스테이블코인은 미국에게 투기성 코인이 아니라, 달러 패권을 디지털 영역으로 확장하는 강력한 금융 무기입니다.
2. 유럽(EU): MiCA로 유로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 안으로
유럽연합은 늘 그렇듯, ‘규제로 인프라를 만든다’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MiCA가 그 대표 사례입니다.
- 2024년 6월부터 MiCA의 핵심 조항이 효력을 가지면서, 전자화폐토큰(EMT, e‑money token)과 자산참조토큰(ART, asset‑referenced token)에 대한 본격 규율이 시작됐습니다.
- 유로에 1:1로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은 EMT로 분류되고, 은행이나 전자화폐기관만이 발행할 수 있습니다.
- EMT·ART가 단일 통화권 내에서 일일 2억 유로, 100만 건을 넘는 결제량을 기록하면, 신규 발행을 줄이고 리스크 완화 계획을 제출해야 하는 상한 규정도 붙습니다.
겉으로 보면 꽤 ‘답답한’ 규제처럼 보이지만, 방향은 분명합니다.
“유로 스테이블코인을 은행 시스템 안에 집어넣고, 안전한 디지털 유로 인프라로 키우겠다.”
달러처럼 민간 주도로 마구 성장시키기보다는, 규제 테두리 안에서 유로 EMT를 키우는 모델입니다. 미국과 방법은 다르지만, “자국 통화 연동 스테이블코인을 본격적인 디지털 머니로 만든다”는 점에서는 같은 축에 있습니다.
3. 일본: 편의점이 아니라 B2B·STO를 노린 JPY 스테이블코인
일본은 엔화 스테이블코인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보수적인 조건을 걸었습니다.
- 2023년 결제서비스법(PSA) 개정과 후속 규정 정비를 통해, 이른바 “디지털 머니형 스테이블코인” 발행 자격을
국내 은행, 자금이체업자, 신탁회사 세 라이선스로 한정했습니다.
- 은행이 발행하는 엔화스테이블코인은 예금보험이 적용되는 예금으로, 신탁회사가 발행할 경우 준비자산 전액을 은행 예금으로 보관해야 합니다.
이 설계는 편의점 결제, 커피값에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대신 B2B와 자본시장 영역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 일본 메가뱅크와 대형 증권사는 무역금융, 기관 간 결제(B2B payment), 그리고 토큰 증권(STO, security token offering) 정산을 엔화 스테이블코인으로 처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일본이 노리는 건 이런 구도입니다.
“소매 결제는 굳이 우리가 다 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엔화로 움직이는 굵직한 기업·금융 거래의 디지털 결제 파이프는 우리가 설계한다.”
스테이블코인의 결제가 B2C 보다 기업간 , 국경간 거래에 보다 효과적인 수단임을 볼 때 이 판단은 무척 유효해 보입니다. 엔화 스테이블코인은 일본에서 B2B·STO 전용 디지털 엔화 레이어로 자리 잡아가고 있습니다.
4. 싱가포르: SGD·G10로 짜는 Web3 FX 허브
싱가포르는 한술 더 떠서, 스테이블코인을 차세대 Web3 외환(FX) 인프라로 바라봅니다.
- 싱가포르 통화청(MAS)은 2023년, 싱가포르 달러(SGD) 또는 G10 통화(USD, EUR, JPY 등)에 1:1로 연동된 단일통화 스테이블코인(single‑currency stablecoin) 만을 대상으로 하는 규제 프레임워크를 확정했습니다.
- 이 프레임워크에서 규제 대상 스테이블코인이 되려면, SGD 또는 G10 통화에 페그, 100% 고품질 유동성 자산(high‑quality liquid assets)으로 준비자산 구성, 발행사는 싱가포르 라이선스를 보유한 금융기관 등을 충족해야 합니다.
이 기반하에 Project Guardian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스테이블코인 실험들이 운영됩니다. MAS는 글로벌 은행·운용사와 함께, 토큰화된 채권·펀드·FX를 SGD·G10 스테이블코인으로 교환·결제하는 네트워크 모델을 검증하고 있습니다.
싱가포르의 목표는 간단합니다.
“SGD를 기축으로, 달러·엔·유로 스테이블코인이 온체인에서 실시간으로 교차되는 Web3‑based global FX market의 관문이 되겠다.”
영토는 작지만, 통화 인프라 전략은 가장 크고 선명합니다.
5. 한국: CBDC·예금토큰은 빠르고, 스테이블코인 전략은 비어 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5‑1. CBDC + 예금토큰: 실험 속도만 보면 상위권
한국은행의 “프로젝트 한강(Project Hangang)” 2단계는, CBDC 기반 도매 결제에 예금토큰(deposit token, 은행 예금을 토큰화한 디지털 예금)을 얹어 소매 결제와 재정 집행까지 테스트하는 구조입니다.
2025~26년 파일럿에서 한국은행은 시중은행, LG CNS, BGF리테일(CU), GS25 등과 함께 예금토큰을 편의점·유통 결제, 정부 보조금 지급에 활용하는 시나리오를 검증하고 있습니다. 공공 디지털 머니(CBDC)와 은행 예금토큰을 이렇게 B2B·B2C 전 영역에 동시에 시험하는 나라는 흔치 않습니다. 실험 속도만 보면 분명 선도 그룹입니다.
5‑2. 하지만 민간 KRW 스테이블코인은 ‘법제·전략 공백’
반대로, 민간이 발행하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원스코, KRW‑pegged stablecoin)에 대한 그림은 거의 백지에 가깝습니다.
- 스테이블코인 발행·유통을 직접 규율하는 2단계 법안(디지털자산 기본법, 스테이블코인 특별법 등으로 불리는 입법 논의)은 2025년 말 결국 2026년 이후로 연기되었습니다.
- 지연 이유로는
- 발행 주체를 은행으로 한정할지, 전자금융업자·핀테크·새로운 인가업자에게도 열어둘지,
- 준비자산·상환 의무를 얼마나 강하게 걸지,
- 금융위·한국은행·금감원·기재부 사이에서 감독·정책 권한을 어떻게 나눌지,
에 대한 이견이 꼽힙니다.
- 금융위는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 컨소시엄이나 구체적 모델은 확정된 바 없다”는 입장을 반복 중입니다.
정리하면, 지금 한국은 이런 상황입니다.
- CBDC와 예금토큰은 실제 편의점 카운터까지 내려가고 있는데,
- 정작 민간이 발행하는 KRW 스테이블코인은 전략도, 법제도, 책임 주체도 불분명합니다.
공공 디지털 머니(CBDC)는 전 영역으로 확장하고, 민간 스테이블코인은 “나중에”로 미루는 구조입니다.
6. 이대로 가면 생길 세 가지 문제
이 구조가 몇 년 더 유지되면, 한국은 세 가지 리스크를 동시에 떠안게 됩니다.
(1) 디지털 달러 의존 심화
규제가 없다고 USDT, USDC가 안 들어오는 건 아닙니다. 이미 해외거래소, 크로스보더 송금, 온체인 디파이(DeFi) 등 경로를 통해 한국 사용자와 비즈니스에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국내에 원화 스테이블코인 전략이 부재한 상태에서는, 앞으로 RWA(실물연계자산, real‑world assets), 온체인 머니마켓, AI·머신 경제 결제까지 달러 스테이블코인 의존도만 높아질 것이 명백합니다.
(2) RWA·토큰 증권(STO)에서 원화의 자리를 잃는다
유럽, 일본, 싱가포르는 이미 RWA, STO(security token offering), 온체인 자금시장의 결제·담보 통화를 자국 통화 스테이블코인으로 설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이 원화 스테이블코인 인프라를 늦게 갖추면, 국내 RWA·토큰 증권 시장조차 KRW가 아니라 달러·엔·유로 기반 토큰을 우회 활용하는 구조로 굳어질 수 있습니다. 원화는 ‘환전 단 한 번’에만 쓰이고, 나머지는 외화 토큰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3) 국내 Web3·핀테크 혁신이 밖으로 빠져나간다
규제가 없으면 혁신이 멈추는 게 아니라, 국내에서 못 할 뿐 입니다.
명확한 스테이블코인 규율과 시장이 없는 상황에서는, 원화 스테이블코인 인프라를 실험하고 싶은 팀들은 싱가포르, 일본, UAE 등 규칙이 명확한 곳으로 법인과 서비스를 옮기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 됩니다.
결국 “법을 미루는 선택”은 혁신을 보수적으로 관리하는 게 아니라, 혁신의 거점과 세수를 해외에 내어주는 선택이 됩니다.
7. 지금 필요한 건 더 많은 파일럿이나 PoC 프로젝트가 아니라, ‘컨트롤타워’입니다.
정리해 보면, 한국은 지금 이미 꽤 괜찮은 카드들을 손에 쥐고 있습니다.
- 공격적인 CBDC 파일럿
- 실제 편의점 카운터까지 내려온 예금토큰 결제 실험
-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모바일 인프라, Web3 개발자, 유통·핀테크 기업들
하지만 이 좋은 카드들을 하나의 일관된 전략으로 묶어주는 스테이블코인 컨트롤타워가 없는게 현실입니다.
컨트롤타워가 해야 할 일은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아주 구체적입니다.
1. 국가 KRW 스테이블코인 전략부터 선택해야 합니다.
- 미국형 전력: “민간 원화 스테이블코인 중심 + 소매 CBDC 최소화”
- 유럽·일본형 전략: “강한 인가·감독 하에 제한된 KRW‑스테이블코인 허용”
- 싱가포르형 전략: “온체인 FX·RWA 인프라와 결합한 KRW 스테이블코인 허브”
중 어떤 조합을 택할지, 아니면 새로운 전력을 만들어야 합니다.
2. CBDC·예금토큰 vs 민간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역할 분담을 설계해야 합니다.
- 공공 디지털 머니(CBDC·예금토큰)는 금융안정, 재정집행, 보편결제 인프라에 집중시키고,
- 민간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RWA, 온체인 머니마켓, 국경 간 결제, AI·머신 경제 등 고부가가치 영역에 쓰도록 설계하는 식의 기능 분리를 할 수 있습니다.
3. 통화·금융·산업·외환 전략을 한 테이블에서 조정할 기구가 필요합니다.
- 금융위, 한은, 금감원, 기재부, 국회, 업계가 각각 따로 이야기하는 지금의 구조로는, 글로벌 속도와 복잡도를 따라가기 어렵습니다.
- 최소한 “원화 스테이블코인, CBDC, 예금토큰” 세 축을 통합적으로 설계·집행할 수 있는 의사결정 권한을 갖는 지휘소가 필요합니다.
세계는 이미 스테이블코인을 통화 전략의 언어로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민간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 유럽은 MiCA 유로 EMT로, 일본은 엔화 B2B·STO 인프라로, 싱가포르는 SGD·G10 Web3 FX 허브로 자신들의 답을 내놓았습니다.
이제 한국의 차례입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만들 것이냐, 말 것이냐”가 아니라,
“어떤 KRW 디지털 머니 구조를, 누구의 책임 하에, 어떤 글로벌 역할을 목표로 설계할 것인가”
를 묻고 답해야 할 시점입니다.
그 답을 모아 하나의 로드맵으로 만드는 일,
그게 바로 지금 한국에 필요한 스테이블코인 컨트롤타워의 첫 번째 임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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